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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무대가 된 도시, ‘세비야’
주성열 교수 | 승인2017.10.23 21:09

세비야(스페인어 Sevilla, 이탈리아어 Siviglia, 영어 Seville)는 인구 70만 명이 조금 넘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행정 수도로, 유럽 음악의 발상지 중 하나이며 악기 제작과 판매의 중심지이다. 이슬람 문화와 유럽 문화가 뒤섞인 신비로운 안달루시아, 카르멘을 닮은 건강하고 활달한 미녀들, 도시를 관통하는 과달키비르강, 정열의 투우와 플라멩코 등이 이 도시를 대표한다. 음악과 관련이 많은 도시답게 콜롬비아 보고타, 이탈리아 볼로냐, 영국 글래스고, 네덜란드 겐트에 앞서 2006년 유네스코 ‘음악 도시’에 선정되었다.

오페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와 <카르멘>이 스페인 남부도시 세비야가 배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세비야는 콜럼버스가 항해를 시작했고 잠들어 있는 곳이며 지금은 스페인의 문화와 예술, 학문과 산업의 중심지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유럽 사교계를 뒤흔들었던 천하의 바람둥이 돈 지오반니(Don Giovanni)의 고향이자 플라멩코와 근대 투우가 시작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가 1602년 옥중에서 소설 ‘돈 키호테’를 구상한 도시이며, 바로크 시대의 화가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7-1682)와 거장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가 예술혼을 키웠던 고향이기도 하다. 이렇게 세비야는 중세 무어(Moor)의 찬란한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유연하게 융합되어 곳곳에 이국적 향취가 넘쳐나는 도시가 되었고, 이 매력적인 도시를 무대로 한 예술작품들은 그 특유의 소재와 낭만성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세비야의 모습은 당대 유럽인들에게도 굉장히 이국적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에서 탄생한 오페라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했으나 오페라의 저항적이고 사회비판적인 내용은 언제나 자신들이 사는 세계와 무관해 보이는 장소에서 무대를 선택하곤 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1816), 비제의 <카르멘>(1875),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1786)과 <돈 지오반니>(1787), 베토벤의 <휘델리오>(1805), 베르디의 <운명의 힘>(1862), 프로코피예프의 <수도원에서의 약혼>(1946), 마누엘 파넬라의 <들고양이>(1916) 등 스페인 오페레타를 포함하면 100여 편의 무대가 세비야이다.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이들 오페라의 공통된 특징은 초연 당시 파격을 넘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킬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팜므 파탈, 난봉꾼들의 불손하고 문란한 이야기, 지배계급의 부조리한 상황, 민중들의 저항정신, 자유, 평등, 혁명 같은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들이 제 3의 도시 세비야를 선택하여 골치 아픈 검열과 탄압의 문제들을 피해 갔다.

파리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 비제의 ‘카르멘’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가장 유명한 오페라 <카르멘>은 1873년, 파리 오페라 코미크(Opera Comique)극장의 예술감독인 카미유 뒤 로클(Camille du Locle, 1832-1903)이 연말 공연을 목적으로 비제에게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하여 탄생했다. 35세의 청년 비제는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단편소설 ‘카르멘’을 읽고 상당히 마음에 들어 작곡에 착수했다. 그러나 대본의 파격적이고 불손한 내용으로 인해 극장장의 반대, 주역을 섭외하는 문제, 리허설의 부재 등 진행 중 많은 걸림돌을 만났다. 뭇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관능적인 제스처, 저급한 대사, 선정적인 춤 등을 연기하는 성악가를 찾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금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도 부도덕한 역할을 할 수 없단 이유로 <카르멘>의 무대에는 결코 서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음악계는 돈 호세가 카르멘을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정을 요구했고, 여공들이 집단으로 싸우는 장면들을 삭제하라고 압박했다. 예상했던 대로 공연이 끝난 후 평론가들은 요부를 앞세운 부도덕한 내용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고, 저속하고 선정적인 대사가 포함된 <카르멘>의 오페라의 대본이 발간되자 대중의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3년 동안 파리에서는 <카르멘>이 사라진 공연이 되었다가 비엔나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재공연이 파리에서 성사되어 많은 인기를 얻었다. 비제는 <카르멘>이 초연된 지 꼭 석 달 후인 6월 3일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 안타깝게도 <카르멘>의 성공을 알지 못했다. 그는 파리에서의 초연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자 실망감과 혹독한 피로가 겹쳐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세비야는 <카르멘>에 등장하는 1820년대의 담배공장과 투우장, 거리와 골목, 광장 등을 보존하여 지금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프랑스 점령군의 눈치를 봐야 했던 베토벤의 ‘휘델리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레오노레(휘델리오)>를 발표할 당시 오스트리아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민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던 시기였다. 1805년 11월 20일 오스트리아 ‘비엔나(Wien) 극장’에서 초연이 이뤄지고 2주 후 나폴레옹 군대가 비엔나를 점령하게 된다. 공연은 프랑스 점령군의 눈치를 봐야 했고, 결국 초연 후 2번의 공연만으로 막을 내린다. <휘델리오>의 원작은 프랑스 작가이자 혁명가였던 장-니콜라 부일리(Jean-Nicolas Bouilly, 1763-1842)가 쓴 ‘레오노레 혹은 부부애(Leonore ou L'amore coniugale)’였다.

프랑스 투르(Tour) 지방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정치적 검열을 피해 18세기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다. 희곡은 프랑스 혁명 당시 투옥되어 죽음을 앞 둔 정치인의 아내가 남장을 하고 남편을 구한다는 내용으로, 정치적 해방을 추구하던 베토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1806년 2막으로 줄인 2번째 <레오노레>가 비엔나 극장주와의 갈등으로 단 한 번의 공연으로 끝나고, 1814년 <레오노레>에서 3번째 <휘델리오>로 제목과 내용이 수정된 오페라가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슈베르트는 이 오페라를 책을 팔아 관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독일 오페라는 베토벤의 이상적인 오페라 작품을 계승하여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마탄의 사수>, 바그너의 ‘뮤직 드라마’라는 오페라의 혁명적인 양식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혁명가가 만든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1786년 모차르트가 발표한 <세비야의 이발사>는 프랑스의 저명한 극작가 피엘 드 보마르셰(Pierre de Beaumarchais)가 쓴 3편의 연작(連作)중 제2편을 원본으로 한 것이다. 3부작 중 제1편은 <세비야의 이발사(Le Barbiere de Seville)>이며 제2편이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 그리고 제3편은 <죄 많은 어머니(La Mere Coupable)>이다. 그런데 오페라로 작곡되기는 2부였던 <피가로의 결혼>이 1부 <세비야의 이발사>보다 앞서 발표되었다. 30년 후 1816년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나오자 <피가로의 결혼> 스토리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피가로의 결혼> 이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무기상이었으며 출판인이었고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에 관여한 특이한 경력을 지닌 혁명가보마르셰는 3부작 중 첫 번째 <세비야의 이발사>라는 희곡을 1775년 파리 코메디 프랑세즈 무대에 올렸다. 프랑스 혁명(1789년)의 기운이 움트던 시기에 <세비야의 이발사>는 파리 시민들에게 혁명의 사상을 심어주었고,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연극의 주인공 피가로는 하찮은 이발사지만 아무리 돈 많고 지체 높은 귀족이라고 해도 그의 앞에서는 모자를 벗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귀족들이 권력을 쥐고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던 시대에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서민들의 눈에는 이발사의 역할이 유쾌하게 보였던 것이다. 드라마를 보는 일반 서민들은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자각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러한 자각심은 인본주의 사상과 접목되어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을 싹트게 만들었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의 대본은 이탈리아의 세자레 스테르비니(Cesare Sterbini, 1784-1831)가 담당했는데 단 3주 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다만 서곡은 작곡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인지 전에 작곡해 놓은 <팔미라의 아우렐리아노(Aureliano in Palmira)>의 서곡을 그대로 사용했다. 1816년 2월 20일 로마의 아르젠티나 극장에서의 초연이 실패로 끝났는데 로시니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재앙이었다. 관객들은 공연 내내 야유를 보내며 소란을 피웠고, 무대장치가 쓰러지는 등의 사고도 일어났다. 소동은 오페라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로시니의 라이벌인 누군가가 보낸 야유꾼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공연은 ‘사자가 포효하는 것과 같은 성공’이라는 신문기사 제목으로도 성공적인 공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성공은 30년 전 비엔나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초연이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30년 전만 해도 귀족들이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귀족을 골탕 먹이는 이발사의 얘기는 공감을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로시니의 경우는 달랐다. 그만큼 귀족들이 큰소리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로시니의 오페라가 인기를 얻었던 이유는 <세비야의 이발사>가 보여준 우아하고 감미로운 멜로디와 반짝이는 위트와 비판, 그리고 사랑 이야기에 밝고 명랑함이 조화를 이루어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코믹)의 진수를 보여준 데 있었다.


사회 개혁을 바라던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의 극작가 피엘 드 보마르셰(Pierre de Beaumarchais)가 쓴 3편의 연작(連作)중 제2편을 기본으로 한 것으로 18세기 초 스페인 세비야 부근 마을에 있는 알마비바 백작의 성을 무대로 하루 동안 일어나는 소동이야기가 전부다. 그러나 남녀 간의 사랑, 부부간의 갈등이라는 이야기 구조 속에 신분 차별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조롱, ‘초야권’과 같은 귀족계급의 전횡이라는 사회문제를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왕과 귀족들의 반발을 염려하여 무대 배경을 파리가 아닌 세비야로 설정한 것이다.

오페라로 공연이 되기 전, 루이 16세와 귀족들은 연극으로 공연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으나 마리 앙투와네트와 살롱을 운영하며 문화계와 사교계를 주름잡던 귀부인들의 압력으로 1786년 초연이 성사되어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럼에도 ‘피가로’라는 하인을 통해 지배계급을 풍자하고 귀족이 하인에게 굴복당하는 등 저항의 불씨가 있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엄중한 제재를 받아 보마르셰는 3년 동안 수차례 대본을 수정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제3부는 아예 당국으로부터 원천봉쇄를 당했기 때문에 공연작품으로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후 오페라가 초연된 지 3년 후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고 사회적 분위기는 고조되었으나, 공포정치가 최고조에 이르자 1793년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혁명의 주역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비엔나에서도 귀족들의 눈치를 보느라 초연 이후 거의 3년 동안 공연이 이뤄지지 못했으나 1786년 12월 프라하 국립극장에서의 공연은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이후 모차르트는 1787년 1월 17일 프라하를 방문하여 <피가로의 결혼>의 22번째 공연을 직접 지휘했다.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했던 이탈리아 오페라단과 프라하의 음악애호가들은 모차르트에게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돈 조반니>가 탄생하였고 그해(1787년) 10월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방탕한 귀족을 암시한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Don Giovanni)>의 원작은 스페인의 성직자이며 바로크 극작가인 티르소 다 몰리나(Tirso da Molina, 1579-1648)가 1620년경 쓴 <세비야의 사기꾼(El Burlador de Sevilla)>이다. 오페라의 시대적 배경은 17세기 중엽 태양이 작열하는 스페인 남부 도시 세비야다. 이것을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벌 받은 난봉꾼(Il dissoluto punito)>이라는 제목으로 대본을 썼고, 다시 간단하게 '돈 지오반니'라고 이탈리아식으로 고쳤다. 당시에는 오페라라고 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이탈리아어로 만들어야 품위 유지가 되었다. 모차르트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로렌조 다 폰테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여자는 다 그래(Cosi fan tutte)>의 대본을 썼다.
 
중세 스페인에 돈 후안 테노리오(Don Juan Tenorio)라는 희대의 난봉꾼이 있었다. 우리가 보통 ‘돈 환’이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그가 농락했던 여러 나라의 여자 2,065명은 돈 환의 하인인 레포렐로가 돈 환을 따라 다니면서 일일이 수첩에 기록한 것이다. 돈 환이 실제 인물인지 또는 전설적인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희곡으로 난봉꾼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돈 환에 대한 얘기가 정작 유명해진 것은 모차르트 때문이었다. 모차르트는 돈 환의 스토리를 듣고 흥미를 가지고 오페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돈 환의 성격과 행동이 자기 자신과 흡사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돈 환처럼 방탕하기만 한 귀족들에 대한 거부반응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원래 티르소 데 몰리나의 소설에서는 돈 환을 일종의 인생 순례자로 그려 놓았다. 즉, 돈 환이 단순히 여성편력이나 일삼는 호색한이 아니라 인생의 참 목적을 찾기 위해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어쩔 수 없이 방황하는 인물이라는 설정이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순례자인 돈 환을 무절제한 연애행각으로 결국 벌을 받는 난봉꾼으로 부각시키면서 권선징악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었다.

중세 이후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를 실험적인 예술로 다루면서 음악을 좀 더 종합적인 형식으로 연구하는 동시에 중세시대에 억압되었던 다양한 종류의 예술을 새롭게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아’라는 스터디 그룹 중 하나인 ‘카메라타’에 의해 지식인과 예술가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연극인 춤, 연기, 음악의 종합예술이 종교적인 소재로만 제한되면서 세속적인 주제의 연극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극복하고 재현하겠다는 목적으로 ‘오페라’가 탄생했다.

음악으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장르 중 유일한 것이 오페라였고,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보편적인 취향에서 벗어나거나 도덕적으로 문란한 것은 배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야기는 당대 사람들의 관심거리를 중심으로 창작되고 시대적인 문제를 다르면서 대중들의 많은 사랑과 인기를 얻었다.

예술품 창작은 익숙함보다는 호기심이나 새롭고 신비한 어떤 것에서 영감을 얻게 마련이다. 예술이 대중들에게 어려운 이유도 일상보다는 지금까지 없었던 특별한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대 가치관으로는 수용하기 어렵거나 정치적으로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종종 창작품은 논란의 중심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한다.

오페라 또한 초연 당시 황제와 왕실의 검열과 후원자의 취향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혹평 등으로 원작은 각색과 수정이 가해져 재탄생했다. 베르디의 <리골레토>는 당국의 검열 때문에 <일락의 왕>의 원제를 사용할 수 없었고, <가면무도회>도 '구스타브 3세'에 대한 암살을 담은 내용이기에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제목을 바꾼 경우이다.

오늘 날에도 예술가의 창작에 대한 감시와 검열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경우에 따라 권력자들의 부당한 요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도전이 되기도 한다. 예술가는 기성의 가치나 상투성을 비판하고 부조리한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도 예술의 형식을 빌려 부당함을 표현한다. 대한민국 정부도 얼마 전 반정부 활동을 하던 비판적인 예술가들을 선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었고, 결국 관련된 예술가들은 책임자들의 법적인 처벌과 재발방지의 제도적 장치 법안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오페라를 공연하는 나라는 독일, 이탈리아이다. 인구밀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베니스가 가장 많은 공연을 하고 있다. 아직도 그들이 오페라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에는 오페라가 시대상황을 적나라하게 반영하여 거센 논란의 중심에 있으면서 민중을 계몽하고 시민의 삶과 호흡을 함께 하던 장르였다는 이유일 것이다. 이는 오페라도 ‘예술을 위한 예술의 모방’이거나 예술가들만의 잔치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에서는 2010년 6월 5일 설립된 한국소극장오페라연합회 주최로 2017년 제18회 소극장 오페라 축제가 9월 2일 개막하여 9월 24일까지 나루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그러나 소극장 오페라 축제는 대중의 관심부족과 관계기관의 허술한 지원 등으로 자립할 수 있는 축제로 거듭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제반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어려워 지난해는 축제를 개최하지 못했던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다. 소극장 오페라 축제는 대한민국 소극장 오페라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발전시키고 창작오페라의 연구와 발표, 젊은 성악가들에게 예술계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좋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법인이다.

2018년은 오페라가 한국에서 최초로 공연을 시작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오페라 역사에서 최초의 공연은 해방이후 1948년 이인선을 중심으로 ‘조선오페라협회’가 무대에 올린 베르디의 <춘희(라 트라비아타)>로 알려져 있고, 두 번째는 한불문화협회가 주관한 구노의 <파우스트>다. 이후 국립오페라단, 김자경오페라단 등 다양한 단체의 활동을 통해 오페라도 한국에서 자리를 잡았다.

최근 올림픽공원 잔디밭에서 열린 정구호 연출의 국립오페라단의 <동백꽃 아가씨>처럼 조선시대 사회를 반영한 작품이 지닌 인기와 사회적인 관심을 통해 잠재적인 가능성도 보았다. 오늘 날에도 오페라가 대중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삶의 문제를 담은 수준 높은 작품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대형 오페라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치밀하게 시대를 반영한 창작오페라의 수용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소극장오페라와 같은 예술 활동의 저변확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극장 오페라 연합회의 자립을 위해서는 물론 관련자들이 높은 수준의 예술 활동을 유지해야 하고, 공공기관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가 지속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 주성열 세종대학교 회화과 겸임교수
-파리 1 대학 예술철학 기초박사
-성균관대 공연예술 박사 수료
-모던 라이프 아트디렉터
-단국대 서양화과 겸임교수 & 산학연구원
-연성대, 극동대 호텔관광 외래교수

 

주성열 교수  td@travel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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