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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여행2-⑥
엄금희 기자 | 승인2018.07.28 17:02

국사암 어제의 궁예와 오늘의 법도 스님


안성 국사암 가는 길이 도솔산 국사봉 암산이라 가파르다. 한참을 국사봉을 오르다 산 중턱에 차를 주차하고 갈팍진 오르막길을 걸어서 오른다. 국사봉의 높이는 444.5m로 국사 신앙으로 유명한 곳이다. 고려 시대 국사를 지낸 도선이 사찰을 세우고 수도한 데에서 산 이름이 유래한다.

국사봉에는 모두 5기의 불상이 있다. 두 기는 미륵사 터에 있으며 세 기는 국사봉 정상 부근의 국사암 법당 오른쪽에 서 있다. 오늘은 국사암의 궁예미륵을 찾아 나섰다.

국사봉 정상의 국사암 석불은 스스로를 미륵의 화신이라 하였던 궁예의 미륵불로 석조 삼존불상의 높이가 본존이 310㎝, 좌협시가 245㎝, 우협시가 230㎝ 남짓하다. 궁예는 약병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좌협시를 문관, 칼을 들고 있는 우협시를 무관, 본존은 자신을 상징하도록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안성 도솔산 국사봉을 올라 마주한 국사암이다. 암반 위에 세운 사찰임을 눈으로 증거한다. 오후의 여름 햇살이 느티나무 잎 사이로 따사롭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인상으로 조각 솜씨도 소박하다. 미륵상은 크기도 작고 단순하게 조각돼있다. 중앙에 궁예를 둔 삼존불의 구도를 지니고 있다.

미륵불의 가운데 불상은 키가 좌우보다 약간 크며, 왼쪽 불상은 보검을 들고 있고 오른쪽 불상은 약병을 들고 있다. 이들 불상들은 모두 보관을 쓰고 있다. 지극히 소박한 양식이다. 삼죽면 기솔리 마을에서는 옛날부터 궁예미륵이라 불렀고 매우 영험하다고 믿었다.

이 석불입상 아래에서 나오는 약수는 병 치료에 좋다고 한다. 암반 위에 세운 미륵불상이라 이곳에 나오는 물은 암반수이다. 이 암반수가 약수이다.

석불입상은 궁예미륵이라고 부르는데 궁예란 인물은 누구인가?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 따르면 궁예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법명을 지어 사찰을 순례했다. 안성은 신라 못지않게 불교가 번창했다.

신라 말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왕도 지역의 바깥 고을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지지하는 것이 반반이었다. 원근에서 도적의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처럼 모여드는 것을 보고 선종(善宗)이라 칭한 궁예는 어지러운 때를 타서 백성을 모으면 가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진성왕 5년, 891년 죽주적괴 기훤에게 투탁했다.

▲안성 도솔산 국사봉을 올라 마주한 국사암에서 바라본 산야의 풍경이다. 경사도 높은 가파른 길을 오르고 나니 한결 편안하다. 심호흡을 하고 바라본 국사암 주변의 풍경은 시원하다. 땀 흘린 뒤의 상쾌한 국사봉의 바람이 자연에 취하게 한다.

선종은 세달사의 승려였다는 궁예의 법명이고 죽주적괴는 죽주의 도적 두목이라는 뜻이다. 기훤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렇지만 신라의 왕족 출신인 궁예가 그 휘하로 들어갔다는 것은 당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죽주는 안성 동부 지역으로 죽산, 일죽, 삼죽 같은 땅이름이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궁예는 '기훤이 업신여기고 예로 대하지 않으므로, 근심하며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가 몰래 기훤 휘하의 원회와 신훤 등과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라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후 궁예는 죽주에서 포섭한 세력을 이끌고 오늘날의 강원도 원주인 북원의 초적 양길에게 다시 의탁한다. 이것이 진성왕 6년, 892년이다. 궁예가 죽주에 머문 기간은 한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궁예가 죽주에 머문 것은 1년에 불과하지만 미륵 세상을 염원하던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궁예 미륵이 그것을 증명한다.

궁예는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898년 오늘날의 개성인 송악에서 기반을 닦은 후 휘하에 들어온 왕건으로 하여금 양길을 물리치게 한 다음 901년 고려를 세우고 904년 마진, 911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꾼다.

왕도를 강원도 철원으로 옮긴 것은 905년이다. 이후 태봉은 북쪽으로는 평양 부근, 남쪽으로는 공주와 상주를 아우르는 영토를 갖게 된다.

▲안성 도솔산 국사암 오층석탑을 극락전 마당에 올라 바라본다. 기단부 구성에서 둔중함과 옥개석 받침이 층마다 정연하게 5단씩이며, 석재 결구에서 좋은 작품으로 주목된다.

궁예는 918년 왕건 세력에게 축출되었으니 그의 왕조 태봉 시대는 불과 20여 년 남짓이다. 비무장지대 철원 풍천원의 태봉 도성에는 궁예 세력이 조성한 석물이 남아 있다.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대형 석등은 일제강점기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6·25전쟁 이후에는 행방을 모르고 있다.

궁예의 태봉 왕조의 존속 기간은 짧았어도 궁예가 승려 출신으로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했던 만큼 불상을 비롯한 불교 조각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안성의 옛 죽주 지역 국사봉에는 궁예미륵이라고 불리는 불상이 국사암과 미륵사에 그것도 복수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 조각들이 궁예와 실질적인 연관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르고 있어 흥미롭다.

새로운 희망을 찾았던 궁예의 발길을 죽주의 땅 국사봉 국사암에서 둘러본다. 안성 국사암의 궁예미륵은 석조 삼존불상이다. 코 부분이 없는 이유는 코를 긁어 가루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없어졌다.

궁예미륵 석조 삼존불상이 있는 국사암은 법상종의 사찰이다. 법상종은 통일신라 때 성립된 불교 종파이다. 유식사상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한다. 법상종의 교의가 되는 유식사상은 중관파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학파를 이루는 유가행파의 교학으로 중국에서는 현장이 소개하고 그의 제자 규기가 하나의 종파로 성립시켰다.

법상종파는 인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법의 사상에 대한 고찰과 분류 해명을 연구의 중심으로 삼는다고 하여 법상종이라 하였다. 규기가 자은사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자은종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장의 제자였던 원측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그 제자들에 의해 유식학 연구가 시작되었다가 순경, 태현 등에 의해 종파로 성립되었다.

▲안성 도솔산 국사봉 국사암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불교에서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당우이다. 예로부터 극락정토신앙이 강하여 대웅전만큼이나 화려하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법상종은 화엄종과 함께 교종의 2대 종파가 되었다. '대각국사묘지'에는 불교 6학파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시대 법상종은 보수적인 귀족세력과 연결되어 교리 면에서 관념화되고 불교의식 등의 형식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특히 고려 중기에는 인주 이 씨의 후원을 받아 왕실 및 기타 귀족들의 후원을 받은 화엄종과 대립되었다.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자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유가업 ·유가교문 ·유가종 ·자은종으로도 부르다가 자은종으로 통칭되어 조선 초에까지 이어졌으나, 교세는 매우 위축되었다.

도솔산 국사봉 아래 국사암은 법상종을 이어받은 법도 스님이 32년간 정진해 온 사찰이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우주 만유의 본원 또는 막힘이 없는 법을 상징하는 일원상이 있다. 선종에서는 1천7백 화두 중  하나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일원의 근본을 추구하는 화두로 통한다.

선방에서는 이 일원상을 그려놓고 참선을 하는데, 이는 언어가 끊어진  선정에 들기 위해서이다. 휴정이 지은 '선가귀감'에는 혜능이 제자들에게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난 것도  아니고 죽음도 없었다. 이름 지을 길이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이 한 물건이  무엇인고?'라고 묻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하택 신회는 '모든 부처의 근본이요, 신회의 성품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한 물건이 바로 일원상이다.

▲안성 도솔산 국사봉 국사암 극락전을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법당이 대웅전 다음으로 많이 있다. 이상향인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보통 동향으로 배치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국사암 대웅전 오른쪽에는 바위에 새긴 마애 산신상이 있다. 국사암의 산신각이라 할 수 있다. 석조 삼존 불 입상 뒤 제일 높은 바위에는 마애 석불좌상이 있다. 궁예미륵불부터 국사암 일원상, 마애 산신상, 마애 석불좌상까지 도솔산 국사봉이 암산임을 나타내듯 법도 스님이 불사를 일으켰다.

국사암의 궁예미륵은 향토유적 제42호로 지정되었다. 과거가 있어 오늘이 있고, 내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모든 역사는 주변의 필요성에 의해 이어진다는 점에서 오늘 국사암 법도 스님과의 인연을 맺는다. 모처럼 말귀가 통하는 법우를 만났다. 처처불상이라. 그저 마음 안에 붓다의 뜻과 법도 스님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행복과 평안을 기원한다.

안성 도솔산 국사봉 국사암의 역사는 궁예의 미륵 사상에서 출발하는 석조 삼존불, 궁예미륵의 역사이면서 통일신라 법상종의 역사다. 궁예의 미륵 사상이 어제의 국사암의 터전이라면 법도 스님이 일궈낸 오늘은 앞으로도 대중들이 바른 가치관을 만들어 내일의 국사암을 일궈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마애삼존불 앞에 기도를 드린다.

궁예가 꿈꿨던 땅 안성 죽산에는 통일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천혜의 요새로 알려진 죽주산성이 있다. 그런데 기솔리 계곡은 북쪽 국사봉을 정점으로 역U자의 지형을 보인다. 남쪽만이 좁은 통로로 열려 있을 뿐이니 방어에 유리하다.

죽주에 머물렀던 궁예의 숨결을 궁예미륵이 있는 국사암에서 느낀다. 궁예(弓裔)는 글자 그대로 '활의 후예'라는 뜻이다. 여기서 활은 주몽을 뜻한다. 곧 주몽의 후예란 뜻이다. 궁예가 고구려의 후예를 표방한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안성 도솔산 국사봉 국사암 마애석불좌상에서 바라본 사찰의 풍경이다. 바위 위에 세운 국사암의 모습이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그러니 궁예가 자신이 현세의 미륵불임을 보여 주려는 의도에서 만든 것이 국사암 석조 삼존불상이다. 국사암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석조 삼존불상을 고려 후기에 만들었다면 앞뒤가 안 맞는다. 궁예 시대에 만들었다면 왜 고려 후기라 할까.

그리고 높게 표현된 머리의 책 모양 보개는 삼국사기 기록처럼 '금책을 쓰고 방포를 입었다'라는 궁예를 상징한다. 책과 방포는 고구려의 왕실 인사나 귀족이 썼던 모자와 겉옷이다.

안성에서 궁예를 만나는 것은 이곳이 미륵신앙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뜻밖이지만 궁예에 대한 유적도 좀 더 찾아봐야 할 것이다. 국사암 석조 삼존불의 궁예 흔적은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Tip
경기도 안성시 국사암 찾아가는 길 주소: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텃골길 80-100
전화: 031-672-3130

 

 

엄금희 기자  ekh@travel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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