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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탄여행
엄금희 기자 | 승인2019.02.10 17:08

두 명의 충신 이충동 조광조와 오달제

평택 이충동의 이름을 아시나요? 구 송탄 지역인 이충동은 두 명의 충신이 있어 이충동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 그렇다면 두 명의 충신은 누구일까요? 이충동 휴먼시아 아파트 4단지 앞 도로변 야산에는 이 두 명의 충신을 기리는 충의각이 있다. 평택시 향토유적 제5호다.

▲평택 송탄 이충동의 유래가 된 충의각과 오학사 달제유사비가 있다. 이충동(二忠洞)은 두 명의 충신이 살았던 동네이다. 이 두 명의 충신은 조선 중종 때 문신 정암 조광조와 인조 병자호란 삼학사 중 한 사람인 추담 오달제이다. 조광조와 오달제는 어린 시절을 이충 마을에서 보냈다.

이 두 명의 충신은 조선 중종 때 인물인 정암 조광조(1482~1519)와 인조 때 인물인 추담 오달제(1609~1637)이다. 충의각은 이 두 명의 충신들의 넋이 담겨 있는 유허지 비를 보존하는 비각이다.

유허지 비는 당시 진위 유림에서 어릴 때 정암 조광조가 학문을 배우며 지냈던 곳이자 삼학사의 한 분인 추담 오달제의 옛집이 있던 산비탈에 비를 세울 수 있도록 나라에 소를 올려 허가를 받아 정조 24년인 1800년에 세운 역사를 지닌다.

▲평택 송탄 이충동의 유래가 된 충의각 현판이다. 정암 조광조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조선 초기에 와서도 도학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다.

충절을 기리기 위한 유허비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에 세운 비로 오랫동안 오학사 비로 불려왔다. 유허비의 정확한 규모를 찾아본다. 유허비의 규모는 비신 55×16×123cm, 비대 67×49×15cm이다. 유허비의 상부에는 '송장(松莊)'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선명하다. 그 아래로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지임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

▲평택 송탄 이충동의 유래가 된 충의각의 유허비 상단에 전서체로 '송장(松莊)'이라 쓰여 있다. 그 아래로 '정암 조선생, 충렬 오학사 유허비(靜庵 趙 先生 忠烈 五學士 遺墟碑)'라고 쓰여 있다. 또한 작은 서체로 유허비를 세운 뜻을 적고 있다.

정암 조광조는 누구인가? 중종 때 사림파의 거두로서 왕도정치를 주장하고, 사회개혁을 하는 등 혁신적 정치를 꾀하다 실각하였다. 당시 진위 유림과의 교우가 두터워 경포산인 최수성, 오좌동의 개척자 최자반과 시론 했다고 진위현·읍지에 나올 만큼 송탄에 그의 유지가 남아 있다.

유교 이상 국가를 꿈꾼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그의 본관은 한양, 자는 효직, 호는 정암이다. 한양에서 개국공신인 조온의 5대손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조원강의 둘째 아들로 성종 13년인 1482년에 태어났다.

▲평택 송탄 이충동의 유래가 된 충의각이 있는 이곳은 부락산 둘레길이다. 부락산 둘레길을 걸어도 좋다. 주변에 이충레포츠공원이 있어 축구, 야구, 씨름, 배드민턴 등 생활체육도 즐길 수 있다.

조광조는 17살에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희천에 유배되어있던 김굉필에게서 수학하였다. 학문으로는 소학, 근사록 등을 토대로 경전을 연구했으며 이때부터 성리학에 힘써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조광조는 송탄 이충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현량과 실시, 소격서 폐지 등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개혁을 추진했다. 조광조는 훈구파의 부도덕성과 전횡을 비판하다가 중종 14년인 1519년 12월 16일에 기묘사화로 전라도 화순의 능주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세상을 하직하니 그때 나이 겨우 38살이었다. 그 후 선조 때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됐다.

추담 오달제는 누구인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했다. 척화론의 거두로 순절한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현 동령 마을에 옛 집터가 있었다.

척화 주전론을 주장한 오달제의 생애를 보자. 오달제의 집은 동령 마을 성재 아래에 있었다. 오달제는 조선시대 3학사의 한 사람으로 광해군 원년인 1609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주이다. 자는 계휘, 호는 추담이라 불렀다.

▲ 평택 송탄 이충동의 유래가 된 충의각의 충의 근린공원 숲길이다. 숲은 나무와 수풀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길을 걷다 보면 삼림이 주는 힐링을 느낀다. 아늑한 숲의 원시를 찾아 형이상학이라는 삼림의 숲길을 홀로 걷는다.

오달제는 오윤혜의 아들로 용인 학일 마을이 고향이었지만 외가가 오좌동 수성 최 씨여서 상속받은 전장과 집이 이충동 반지산 기슭에 있었다.

오달제는 19살 되던 해 사마시에 합격하고, 인조 12년인 1634년 26세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전적. 병조 좌랑, 시강원 사서, 정언, 지평 수찬을 거쳐 인조 14년인 1636년 부교리가 됐다.
 
당시 후금은 조선이 은연중 명나라를 지원하면서도 사절의 내왕조차 없다는 구실로 인조 5년인 1627년 쳐들어오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그 후 후금은 명나라를 공략하는 한편 조선에게는 식량과 병선 등 많은 물자를 요구한다. 조선에서는 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주화파와 청은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는 척화파가 대두하였다. 오달제는 홍익한, 윤집과 함께 척화 주전론을 주장하며 청과의 화해를 끝까지 반대했다.
 
인조 14년인 1636년 청태종은 척화론자를 압송해 보낼 것을 요구하고 조선이 이를 듣지 않자 10만 대군을 이끌고 재차 침공해왔다. 청태종은 강화도에서 잡은 포로를 송환한 다음 그들의 진중에 억류했던 세자,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와 윤집을 잡아 심양성 서문 밖에서 윤집, 홍익한과 함께 처형을 하니 세상에서 이들을 삼학사라 부르며 그 절개와 충성심을 높이 기리게 됐다. 
 
삼학사의 절개와 충의는 효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포상되었다. 좌승지, 영의정에 추증됐으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경기도 광주의 절현사, 평택의 포의사우, 용인의 충렬서원, 홍산의 창렬서원, 영주의 장암서원, 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됐다.

이 두 충신으로 인하여 이충동이란 마을 이름이 탄생했다. 이충동의 지명을 갖게 한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지에서 충의각을 둘러보며 유허지 비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이곳은 또한 충의 근린공원과 부락산 둘레길이다.

그동안 송탄 이충동 충의각은 진위 유림들에 의해 이충 마을과 동령 마을에서 관리해 왔다. 도시의 확장에 따라 역사의 지명이 담긴 문화재가 두 충신에 대한 충절의 뜻과 함께 앞으로도 잘 보존되기를 바란다.

Tip
경기도 평택시 송탄 충의각 찾아가는 길 주소: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 산 37-1 휴먼시아 아파트 4단지
전화: 031-610-8614 중앙동 사무소, 031-668-7581 동령 마을 대표

엄금희 기자  ekh@travel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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