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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지 소환법①-홍콩
이정민 기자 | 승인2020.12.20 15:55

여행지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것이 연필이든 물감이든 상관없다. 제 아무리 수백만 화소의 카메라도 그곳을 명확히 기억시키지는 못한다. 창틀의 모양, 간판의 종류, 나무의 상태, 빛의 양과 방향, 심지어 바람의 흔적까지 기억하게 한다. 그림자는 덤이다.

내가 기억하는 여행지 홍콩은 ‘붉은색’이다.

4B로 붉은색을 표현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극단적인 명과 암으로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다.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리려면 최소 3일 동안은 같은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서 그려야 한다.
그래야 빛이 일정하다. 어차피 그림도 빛이다. 사진과 같다. 빛.

지금 그 곳의 빛이 궁금한지라···또 다른 계절에 다시 연필을 깎았다.
나의 여행지 소환법이다.

그림과 여행을 생각하면 25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빛의 일정함을 그림에 반영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때다.

같이 그림을 공부하던 동료들과 여름이면 러시아의 한 지방으로 그림 여행을 떠났다. 반 강제 커리큘럼으로 6~7인이 한 조가 돼 2주 가량을 머물면서 다양한 풍경화를 그려야 하는 프로그램이다. 의욕만 앞섰던 때라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한 장소에서 뙤약볕을 맞으며 그림을 그렸다.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은 소풍 나온 듯 여행을 온 듯 인근 지역을 유람하며 즐기기만 할 뿐이다. 그러던 중, 해 가 질 무렵이 되니 대략 1시간 정도 이젤을 펴고 잽싸게 그림을 그려댄다. 하루에 딱 한 시간 해가 뜰 무렵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다.

일출과 일몰의 때가 가장 명암을 표현하기도 쉽고 다양한 빛의 맛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것을 몰랐던 게다. 게다가 일출 때는 자연에 가까운 곳으로 일몰 때는 도심에서 각기 다른 때를 캠버스에 담아냈던 것이다.

도심의 풍경, 시골스러운 자연의 풍경마저 빛의 양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다른 감정을 그려내는 그들의 버릇과 능숙함을 한 수 배운 후, 이제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철저히 그들의 원칙을 따라야만 할 것 같은 ‘노이로제’가 걸렸다.

어디로든 갈 수 없는 지금이 어쩌면 여행지에 대한 기억 소환을 하기에 딱 좋은 때다.
지난봄과 여름, 유럽의 시골 풍경을 담아 본 이후 계절은 정반대에 머물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 중 가장 하기 싫으면서도 귀찮은 작업, 하지만 이거 잘못하면 말도 안되는 낙서로 바뀔 수 있는 것이 ‘구도’를 잡고 ‘형태’를 그려내는 일이다.

사실 도시의 그림이 시골풍경의 그림보다는 쉽다. 재미는 없다.
정확한 각도와 배치를 이루고 있는 도심의 건물은 ‘원근법’만 잘 적용한다면 매우 쉬운 밑그림을 얻을 수 있다. 도심은 가진 것도 많아 공간을 메우기도 좋다. 화려한 구성이 가능한 것이 도심의 그림이다.

하지만 시골의 풍경은 기껏 해야 나무, 하늘, 구름, 능선 정도가 전부다. 가끔 해안, 호수, 배 정도가 다다. 구성만 본다면 텅빈 공간인지라 재미없는 그림이 될 수 있다. 그만큼 표현에 어려움이 따른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두 가지를 택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가능케 하는 첫 번째 여행지 소환이 그래서 홍콩이다.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가장 귀찮게 여기는 구도 잡는 일이 다 되어 있는 귀한 보물을 손에 넣었다. 그림을 좀 그려 본 사람이라면 왜 보물로 표현하는지 이해할 테다.

내 눈 앞에 놓인 붉은색 전차를 명암만을 통해 표현하기 위해 4B연필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이것은 과일 깎는 소리가 아니다.

종이에 닿은 연필의 소리다. 연필이 종이 위에 닿는 소리다.

그렇게 하나 둘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어 가면서 홍콩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친다.

여행의 기억은 ‘점’처럼 작은 순간의 기억이 이어져 하나의 ‘선’처럼 에피소드가 되고 이 ‘선’이 모여 커다란 인생의 한 장면(면)으로 남는다.

그동안 홍콩을 제대로 여행해 본 기억이 없다.
수차례 다녀온 곳이지만 가족을 보필하고 그들을 가이드 하느라 생각하고 여행해 본 기억 이 없다.  아니면 일하고 취재하러 가느라 시간 짬을 낼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서도 밤의 홍콩 거리를 누볐다. 낮에는 시끌벅적 여행자들로 붐비던 도심 뒷골목이 밤에는 좀 한가 하려나 하는 기대였다. 기대는 예상이 되고 예상은 현실로 다가올 때 어떤 기쁨보다 더 행복하다.

각자 여행에서 발견하는 반가움은 다르다. 어떤 이는 쇼핑을 통한 ‘득템’ 어떤 이는 기막힌 ‘먹거리’의 경험일 수도 있겠다.

특이하지만 나는 길거리 ‘버스킹’하는 이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행복할 수 없다.
유럽 지역에서는 어렵지 않게 길거리 버스킹을 접할 수 있지만 홍콩에서 그것도 밤거리, 도심 골목에서 버스킹을 만난다는 것은 반가움을 넘어 깊은 만족감이다.

▲홍콩에서 그것도 밤거리, 도심 골목에서 버스킹을 만난다는 것은 반가움을 넘어 깊은 만족감이다.

유명한 멜로디가 아니어서 더 좋다. 그야말로 홍콩의 밤거리를 표현하는 홍콩다운 멜로디며 가락이다. 장국영의 ‘영웅본색’ 주제가를 입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 멜로디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그냥 중화풍이면 된다.

행운의 홍콩 버스킹을 다시 떠올리니 완차이 거리의 트램과 트램의 그림자까지 대략적인 표현이 이어진다. 뒤쪽으로 알록달록한 덩라우 건물을 그리면 홍콩의 첫 장면이 마무리 된다.

창문이 좀 많다. 그림 그리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창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좀 짜증난다.

▲완차이 거리의 트램

하지만 밑그림에 이미 수많은 창문이 그려져 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홍콩의 대표적인 도심 완차이 거리를 흑백으로 표현하는 일은 수십 가지 손해를 보는 일이다. 색채로 표현한다면 트램의 붉은색만 덧칠해도 기대 이상의 작품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심을 그렸으니 이제 자연이다.

이번에도 이미 구도와 형태가 잡혀 있는 빅 부다, 옹핑 타이오 마을과 디즈니랜드가 있는 란타우 섬이다. 구도로만 보면 아방가르드다. 하지만 홍콩의 자연을 대부분 담아낸 것 같아 흥미롭다.

사실 홍콩은 물의 도시다. 도심에서도 조금 외곽으로 나가도 물이다.
밤의 야경을 봐도 공중의 수증기와 습기로 가득하다.

▲빅 부다, 옹핑 타이오 마을과 디즈니랜드가 있는 란타우 섬

하지만 란타우 섬에서 보이는 물은 과감히 생략하기도 한다. 거대 불상과 케이블카만 표현해도 이미 그림의 절반은 완성된다. 구름은 형태로만 남겨 놓기로 한다.
홍콩의 자연에서는 복잡함 보다 단순함이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역시 여행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완차이의 건물과 창문, 베란다에 걸려있는 누군가의 빨랫감, 아스팔트 위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노랑색 실선, 란타우 섬 인근의 수상가옥, 그 앞의 조각배, 심지어 케이블카의 형태 등 이제야 하나하나 제대로 보인다. 홍콩이···

이정민 기자  ljm@travel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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