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비루한 것에 대한 예의, 여행지의 공백을 보라

2024년이 밝았다. 일상성에 비례해 여행산업 또한 혹독했던 난파 위기 이후 빠른 회복세를 보인다. 지난 7월 인바운드 관광객이 100만 명을 넘었고, 아웃바운드의 증가세도 못지않게 빠르다. 팬데믹 이후로, ‘힐링’을 중심에 두고 많은 사람이 운집한 곳보다는 좀 더 조용한 공간에 홀로 다가가는 여행도 주목받고 있다. 자기 인식과 발견을 통해 마음의 불안을 쫓고 안정감을 되찾는 과정은 일종의 정신적 웰니스의 추구와도 맞닿아 일종의 문화적 경험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전망이다.

최근 한 기사를 살펴보면 모 여행사가 제안하는 2024 여행 트렌드 키워드는 개인의 책임감 있는 여행, 일상 속 여행, 공동체, 매니아, 탐험가, 재충전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또한 최근 3년간의 다양한 데이터를 종합 분석해 ‘나만의 경험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가치를 중시하고 있다. 

모 항공사도 취미나 흥미 요소를 계기로 여행을 떠나고 본인의 관심사를 위해서는 비용 지출도 마다하지 않는 여행 형태가 전 연령대에서 유행한다고 분석한다. 대부분 2024년의 여행 전망 중 하나는 인적이 드문 여행지를 방문하거나 뜻밖의 여정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예상치 못한 경험을 마주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타인과는 차별화된 여행 경험을 위해 숨겨진 관광지를 찾는 수요층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이색적이고 숨겨진 관광지를 찾아 인증하는 문화가 확산 중이며 여행 관련 키워드 중에서도 ’숨다/숨은‘이라는 내용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00데일리/ 2023. 12. 13일자) 

이처럼 여행 트렌드의 중심에 차별화된 주제여행에 관한 관심이 확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행을 통한 낯선 문화 경험도 중요하지만, 개인적 특성에 따라 주제를 정하고 콘텐츠를 구성하여 여행의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려는 의도이다. 모두가 예술가의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창의성을 추구하는 예술적 삶을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일상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그 일상을 극복하려는 창조와 생성의 존재이며 바깥으로 향하는 실존적 존재이기에 공백을 사유하는 유령처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본래 여행이라는 뜻의 라틴어 ‘itinerarium’의 어원은 ‘iterum’, 즉 반복을 의미한다. 대체로 문화는 승자의 관점에서 정리되고 요약된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행이라는 탐사의 실행이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고 있는 자에게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행은 승자의 원칙에 따라 조성된 공간과 유포된 정보로 반복적인 방문이 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공간에는 한 시대의 이념과 승리한 권력자들의 성취가 녹아 있기 마련이어서 패자나 주변인들의 고통이 포함되지 않은 문화유산이 대부분일 것이다. 또는 현란한 볼거리들이 만들어져 있어 반복적으로 방문하고 학습함으로써 사람들의 시각이 스펙터클한 것에 익숙해지도록 조작한 공간이 대세였다. 

그저 동일한 장소를 반복적으로 순례하는 것이라 여겼던 ‘속는 자들의 여행’이 요즘 주제여행 중 하나인 ‘다크 투어’를 제외하고는 부당하게 꾸며진 승자만의 화려한 랜드마크 방문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라캉의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라는 말처럼 자신만의 가치관에 따라 ‘방황하는 여행’을 선택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주제여행의 가치는 타자의 삶을 관찰하고 현지인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체험으로 일상적이거나 비루한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은 여행지의 전통 시장이나 구석진 뒷골목을 방문하면서 간혹 마주치는 노숙자들과 산보자에게 호기심을 갖기도 한다. 지각은 섬광처럼 부지불식간에 직관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일상에서 근대성의 가치를 보았고, 보들레르는 누추하고 비루한 것에게 예의를 갖춘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공백이라는 도심의 어둠침침한 사유에서 나온 작품이다. 낡고 허름한 골목, 뒤처진 것들을 바라보며 현대적 삶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상품으로 진열된 산물이 아닌 사물로서의 대상에 직접 접근하는 것, 즉 화원에서 길러진 화려한 꽃이 아니라 발아래 들풀과 마주하는 여정인 것이다. 진정한 여행은 패키지와 같은 산물(상품)보다는 사물을 만나 새로운 주체로 변형될 기회를 포착하는 일에 더 근접한다. 낯선 곳을 통해서 익숙한 곳을 다시 보듯 나를 떠나는 여행은 또 다른 나를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창조적 삶은 재미에서도 얻어지지만 비루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에서도 시작된다. 탁월한 감각을 지닌 독일 인문학자 발터 벤야민은 쓰레기 더미에서 보석을 발굴해 내는 사람이었다. 여행이 반드시 즐거워야만 할까.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 잠시 떠나 일상을 떨쳐버린 해방의 기분을 느끼며 기대치 않던 시간을 맞이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지식의 권력이 닿지 않는 폐허와 공백의 공간, 제3의 배제의 공간과 경계의 공간이 창조의 공간이다. 폐허와 같은 망각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입체주의 화가 피카소는 기존 작업에는 없는 새로운 조형 언어를 발견하였다. 

초현실주의도 이성의 가치보다는 모호한 꿈과 무의식에 주목하여 화려하고 떠들썩한 상품사회의 배후와 그 의미를 통찰하면서 탄생했다. 무시된 역사의 구석구석에 주목함으로써 잠들었던 꿈의 영역을 일깨우자 한 것이다. 상처가 난 장소에서 새 생명이 움트는 초현실적인 상황은 현실에서도 가능하다. 

라캉은 포획된 텍스트를 정교하게 파편화하여 안정된 가치를 흔들고 이를 일종의 방황과 고난의 가치로 바꾸라고 주장한다. 확실성이 아닌 모호성으로 개념을 확산하고 일탈의 상황을 극복하고 나아가다 보면 라캉이 말하는 개방적인 주체와 창조적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기억보다는 망각을 통해 긍정적인 삶의 철학과 능동적인 가치를 발견하면 좋겠다 싶어진다. 망각의 사유는 자의식의 동일성을 제거하고 공동체 삶의 능동성을 확보할 것이다. 서로의 비어 있음, 공백의 마음이 필요한 이유는 우발적인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교감과 창조의 가능성을 위해서다. 

선험적 자아를 버리고 여행지의 공백을 마주하는 태도는 타자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의 공간으로 확장될 것이다. 폭풍의 눈은 비어 있으나 엄청난 위력을 갖춘 여백이다. 자의식을 비워야 그 자리에 사물이 전하는 거대한 울림이 파문처럼 널리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비치코밍 등과 같은 지속 가능한 여행이 되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이나 여행 지역의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지는 공정여행이면 좋겠다. 

여행(Travel)의 어원은 일(Travail)과 동일한 의미에서 출발한다. 이제 먼지가 쌓인 곳으로 향하는 로봇 청소기처럼 비루하거나 감춰진 여행지를 숙고하고 발굴해도 좋을 시간이다. 루쉰은 “길이라는 것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면서 그게 길이 되는 거다”라고 말한다.

◆주성열 교수
-파리 1 대학 예술철학 기초박사
-성균관대 공연예술 박사 수료
-모던 라이프 아트디렉터
-단국대 서양화과 겸임교수 & 산학연구원
-연성대, 극동대 호텔관광 외래교수

주성열 교수  webmaster@travel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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