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예술가적 삶을 위한 여행, 예술과 여행은 닮았다

최근 2개의 대형 미술 전시회 서울시립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1882-1967): 길 위에서’와 리움미술관의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에 다녀왔다. 카텔란의 파격적이라 알려진 작품 중 2019년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처음 발표된 <코미디언(Comedian)>도 만날 수 있었다. 

이 설치작품은 먹을 수 있는 바나나를 은색 테이프(duct tape)로 벽에 붙여 놓은 것이다. 2019년 전시에서도 30센트짜리 바나나가 작품으로 변용되었고 페로탱 화랑이 출품한 3개의 에디션 중 2개의 바나나가 각각 12만 달러(1억 4천만 원)에 즉석에서 판매되었으니 역사상 세상에서 가장 비싼 바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인 12월 8일 한 행위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가 나머지 하나의 ‘바나나 작품’을 먹어치우는 일이 발생했다. 페로탕 디렉터는 “바나나는 발상일 뿐 다투나가 작품을 파괴한 것은 아니다”라며 수습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최근 리움미술관 전시 중에서도 관람객이 배가 고프다면 바나나를 떼어내어 즉석에서 먹어버렸고 껍질만 다시 붙여 놓은 촌극이 있었다. 별도의 손해배상 없이 새로운 바나나로 교체되었다. 

고가의 바나나라는 파격적인 작품과 자격이 부여된 예술품으로서의 바나나를 먹어치운 반달리즘 사건에 대해 매체들은 앞다퉈 보도했고 유명세는 더해졌다. 바나나(Comedian) 덕에 예술(art)은 코미디(comedy)가 되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길 위에서> 전시도 연일 관람객이 몰려 서울시립미술관은 초만원 상태였다. 호퍼 작품 중 대부분은 낯선 장소를 배회하는 여행자와 여행 공간의 영역에 속한 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바라보고 재현한 것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물의 낯선 상황들을 보여주거나, 도시 공간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을 시각화한다. 

호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1941~1955년 동안 자동차를 몰고 미국을 다섯 번이나 가로질렀다고 한다. 여행 중 도로변에 외롭게 서 있는 건물이나 네온이 깜박이는 모텔도 그의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은 고향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 쓸쓸함을 더한다. <자동 판매 식당>, <휴게실>, <햇빛 속의 여인>처럼 작품 속 주인공들은 각자 멍하게 있거나 우두커니 허공을 바라보며 있다. 상처받은 듯 자기 내부를 응시하는 표정이기도 하다. <203호 열차 C 칸>은 기차 소리와 창밖 풍경이 어우러진 꿈결 같은 분위기 속에서 관객을 일상적 자아로부터 밖으로 나와 얻기 힘든 생각과 기억에 접근하게 한다. 

창의적인 예술품은 새로운 사유의 집적물이어서 감상자에게 철학적 사유를 제안한다. 또한, 예술가의 행위는 일상과 정상성을 벗어난 파격적이며 흥미로운 볼거리여서 독창적으로 세상을 관찰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곤혹스러운 상황이 관람자를 당혹하게 하여 스스로 문제를 던지고 그 속에서 솔루션을 찾도록 하는데 그 해결점이 창의성의 바탕이기도 하다. 

카텔란의 작품 바나나에서 클리셰 너머로 새로운 미학적 사유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1919년 뒤샹은 관습적인 미술과 미술관에 대한 공격으로 예술과 예술 제도를 혁신하기 위해 <샘>이라는 제목의 기성품인 ‘남성 소변기’를 제시했었다. 
그러나 100년 후 발표한 카텔란의 바나나(Comedian)가 던져 놓은 메시지는 자신의 명성과 유명세를 더하기 위한 얄팍한 제스처는 아니었을까 궁금해진다. 작품이 훼손됨으로써 유명세를 더하며 높은 가격으로 낙찰받는 작품들이 반복적으로 출현하고 있다. 
낙찰되는 순간 작가가 설치한 도구가 작동되어 스스로 잘려버린 작품 뱅크시의 '풍선과 소녀', 최근 마이애미 전시 중 관람객이 박살 낸 제프 쿤스의 ‘풍선개’는 깨져버린 조각들을 경매에 올릴 계획이라는 소식이다.

창의적인 예술품은 인류에게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준다. 예술을 통해서 인식하는 능력,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고 창의성을 창출하도록 이끈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가 창의적이며 동시에 예술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만든다. 예술은 어떤 질서나 양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지향한다. 
문화를 형성하는 핵심이면서도 그 패턴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사고를 탄생케 하는 가장 능동적인 원동력이다. 세상을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일, 기성질서에 단순 편입을 거부하고 주체로서 살아가는 일, 바로 이것이 예술의 근본 성질이며 여행의 가치다. 

여행도 새로운 생각을 불러 모은다.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순간부터 자신과의 내적인 대화는 시작된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롤링은 영감을 어디서 얻었는지를 묻자 ‘기차를 타고 가는데 누군가가 내 머리에 아이디어를 확 집어넣는 것 같았다’라고 대답했다. 낯선 곳에 다다르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큰 생각이 큰 광경을 요구하듯 갑작스러운 영감은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다.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진행이 순조로울 수 있다. 해야 할 일이 오직 생각뿐일 때 정신은 그 일을 버거워하지만, 음악을 듣거나 나무를 바라보는 식의 정신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생각도 쉬워진다. 

식물을 바라보는 산책을 하면 창조성이 높다고 한다.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꾸다 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드는 것처럼 스쳐 지나가는 여행의 풍경을 통해 우리는 잠깐 사적인 영역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익숙한 곳은 아니다. 루소, 니체, 칸트 등 많은 철학자와 베토벤은 새로운 악상을 위해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에도 사색을 위해 산책하며 자연을 바라보았다고 전해진다. 평생 일상으로부터 탈주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보들레르의 시적인 삶이 있고, 반 고흐는 아를르라는 낯선 곳에서 15개월 살면서 3백여 점이라는 작품과 스케치를 남기고 사라졌다.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 동안 낯선 곳을 향한 호기심이 발생하고 자유에 대한 욕구가 싹튼다. 여행의 사유는 낯선 곳으로 공간이동과 전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감탄과 당혹감 혹은 고통을 체험하면서 나온 질문에서 시작된다. 

카뮈는 즉흥적으로 기록한 여행일기를 다듬어 단편소설 <자라나는 돌>, <가장 가까운 바다> 등 여행에서 얻은 정수를 작품으로 옮겨 놓았고, 스페인의 발레아레스 섬 여행은 산문 <삶에의 사랑>, 프라하 여행은 <여행 속의 죽음>, 이탈리아 여행은 <행복한 죽음>, <사막> 등 여행으로 얻어진 에피소드와 이국적 정서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나 상징적인 가치를 얻게 된 것이다. 카뮈는 ‘여행은 고통스러운 관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했다. 김화영의 말을 덧붙이면 그에게 여행은 일종의 고행이었고 자기완성의 한 형식이며 낯설게 하기를 통해 삶의 참다운 얼굴을 발견하는 수단이었다. 

특별한 사유가 필요할 때 우리는 주위의 낯선 세계로부터 은근한 도움을 받는다. 여행의 본질적인 고립과 침묵과 외로움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여행에 몰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일시적으로 망각하는 것을 감각적 마비효과라고 부른다. 

고립된 장소에서는 이미 터가 잡힌 일반적인 세상의 편안함이나 습관, 제약과는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은연중에 기대하기 때문이다. 가정적인 분위기의 결여, 익명의 가구는 흔히 거짓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가정의 위안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Laurence Devillairs) "바다와 태양이 우리에게 끝없이 전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전한다. 시는 여행지로 안내하며 그림은 색다른 사유로 인도하고 음악은 환상으로 모신다. 마음을 비우고 예술을 접속하는 순간 최고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마음의 창문은 열리고 벽으로 막힌 세상의 모든 것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호승 시인은 ‘창문은 닫으면 창이 아니라 벽이다 / 창문은 닫으면 문이 아니라 벽이다.’ 열기 위해 창문이 만들어졌음을 아는 데 평생이 걸렸다고 시인은 말한다. 

오늘이 아닌 내일의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오늘을 벗어나는 일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소소한 일탈의 형식에는 여행도 포함된다. 여행은 낯선 공간에서 타자와의 만남이기에 창조적 삶을 위한 기본적인 실천적 행동이다. 예술적 행위가 일상적인 삶의 프레임을 벗어나는 순간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되는 것처럼 여행을 떠나는 일에도 용기와 준비가 필요하다. 

작품을 최초로 마주할 때 느끼는 설렘이 여행지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여행의 가치는 나를 타자의 공간에 온전히 던져 놓는 것이다. 타자화하는 능력이 내가 가진 가장 큰 힘인 것이다. 박노해의 <남이 될 수 있는 능력> 시 중 일부다. ‘남이 될 수 있는 만큼이 나인 것을 / 남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진정한 실력인 것을 / 진실로 남이 될 수 있는 능력이 / 내가 가진 가장 큰 힘인 것을’

◆주성열 교수
-파리 1 대학 예술철학 기초박사
-성균관대 공연예술 박사 수료
-모던 라이프 아트디렉터
-단국대 서양화과 겸임교수 & 산학연구원
-연성대, 극동대 호텔관광 외래교수

주성열 교수  webmaster@travel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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