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다시 프랑스... - 트래블데일리

어렴풋한 기억으론 아마도 고등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행여 중학생 시절 아니었던가 기억을 고집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당시에는 시시콜콜한 연예인 이야기와 다니던 교회의 한 소녀에게 관심이 더 컸던 것 같다.

확실히 고등학생 때다. 당시 세계사를 알려주던 선생은 전교조 가입 교사라는 이유로 경찰이 그를 잡으러 학교에 왔던 기억이 난다. 이 정도 상황을 기억하는 것만 봐도 당시가 확실하다.

‘노르망디’라는 소리는 그 선생에게 처음 들었다. 이전에도 수없이 귓가를 스쳤겠지만 뇌속의 주름에 자리 잡은 건 당시가 처음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노르망디를 처음 듣고는 사람 이름이려니 했다. 수업을 마친 후엔 시험을 위해 아무 생각없이 외워야하는 이름이었다. 노르망디가 프랑스땅인지, 독일땅인지, 영국땅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마하 해변에 있는 ‘American Cemetery of Normandy’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맹신하던 한 천재 영화감독의 작품이 이상한 한국어 제목으로 변형돼 나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제목만으로 천재 감독의 만화영화라는 낯설음과 함께 영화를 봤고 만화 이상의 현실을 재현한 그의 천재성을 확인한 후, 노르망디는 이제 더 이상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몇 백년 몇 천년전의 설화(說話)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편으론 프랑스 땅이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80년에 가까운 아픔의 세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조국을 사랑하지만 이 고국은 옛 것, 더군다나 아픔의 옛 것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치워버리는 습성이 있다. 공간은 깨끗해져 좋지만 머릿속까지 깨끗이 지워지는 기분이라 불편하기 짝이 없다.

▲평화만 남은 노르망디 유타 해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의 날이다. 내년이면 80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탄생년도가 그 즈음이니 현실 속 기간이며 머지 않은 과거다.

당시 미군이 맡았던 서쪽 ‘Utah’ 비치에서 동쪽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5개의 상륙작전 해변을 둘러보고자 하니 분명 맨 정신으로는 쉽지 않다.
40도 정도 되는 알코올을 시음을 한 후 시작되는 게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알로올 시음 후, 결코 ‘거룩한 희생’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잔혹했던 현장의 평화로운 여행을 시작해 본다.

◆프랑스를 바꾼 또 하나의 사과 ‘CALVADOS’
세상의 위대한 것들은 대부분 척박한 환경적 요인이 작용한다. 프랑스하면 와인이고 와인하면 포도다. 좋은 포도는 알다시피 좋은 태양과 바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남프랑스의 대부분은 포도 재배에 매우 좋은 기후조건으로 굳이 포도를 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북프랑스는 얘기가 좀 달라진다. 포도보다는 사과가 더 어울리는 곳이 바로 북프랑스다. 포도보다는 사과가 낫다는 얘기지 포도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포도보다는 사과가 더 어울리는 곳이 바로 북프랑스다.

감히 말하자면 인류를 바꾼 사과는 크게 세 가지다.
먼저 뉴턴의 사과다. 그리고 아이폰의 그 애플이다. 마지막으로 북프랑스 노르망디 지역Pont l’Evêque의 사과다.

▲왠 시골마을에 창고 비슷한 건물이 있다. ‘CALVADOS Experience'다.

사과 재배에 최적지인 만큼 그 많은 사과를 그냥 놔 둘리 없다.
원래 음식이라는 것은 모자라면 남의 것을 빼앗고, 적당하면 그냥 있는 것만 먹고, 차고 넘치면 술을 만들어 먹는 게 인간의 습성이자 본능이다.
술 ‘CALVADOS’가 탄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가격은 같이 한 잔 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가격이다.

왠 시골마을에 창고 비슷한 건물이 있다. ‘CALVADOS Experience'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외관과는 달리 테마파크 이상의 실내 체험 콘텐츠를 갖고 있다.

사과가 재배되기 시작한 역사부터 흘러넘치는 사과풍년의 시절 그리고 이 사과를 ‘CALVADOS’ 브랜드로 만든 과정을 영상과 3차원 그래픽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3차원 그래픽 공간이란 이렇게 만드는 거야! 라고 알려주는 듯 공간감과 현실감이 최상위 수준이다. “기껏 술 브랜드 하나 소개하는 데 이 정도라고?” 저절로 나온다. 이런 소리...

▲사과가 재배되기 시작한 역사부터 흘러넘치는 사과풍년의 시절 그리고 이 사과를 ‘CALVADOS’ 브랜드로 만든 과정을 영상과 3차원 그래픽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공간 체험 후, 애주가들에게는 기다리던 시간이 시작된다.
평균 40도 이상의 주류들이다. 먼저 액체를 담아낸 유리병 자체가 예술의 경지다. 대단히 비싸 보이는 양주쯤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루이14세 정도가 보관하고 마셨던 그런 분위기의 술병이다. 그에 비해 가격은 같이 한 잔 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가격이다.

◆가장 잔혹했던 해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현장을 보려면 좀 더 영국쪽으로 가야한다.
1944년 6월 6일 새벽, 미군이 담당한 ‘Utah Beach’는 상륙작전 당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전투의 현장이다. 어쩔수 없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봐야 한다. 가장 실제와 가깝게 연출됐다고 하니, 투어 전 미리 시청하고 현장을 간다면 더욱 좋겠다.

▲‘Utah Beach’

사실 ‘Utah Beach’에서 해변을 따라 북서쪽으로 간 후, 다시 남쪽으로 해변을 따라 내려가면 그 유명한 ‘몽셀미쉘’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참기 힘든 유혹이다. 시간과 돈의 여유가 있다면 충분히 권할만 한 곳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음 프랑스 여행으로 미뤄두길 권한다.

아깝다 생각하면 프랑스 여행 못한다. 속병 난다. 그냥 차후에 ‘렌(Rennes)’지역과 함께 묶어 여행 계획을 세워보는 게 낫다. 프랑스는 다 예쁘니까.

▲뚜껑이 없는 철갑 보트에는 대력 30명 정도가 타고 있다. 해변에 이르자 앞 문이 열리면서 저 멀리 독일군의 벙커에서는 속사포가 내리 꽂힌다. 몇 초전까지 옆에 있던 동료는 앞에서 꼬꾸라진다.

‘Utah Beach’에서는 상상의 나래가 필요하다. 감정의 이입이 더해진다면 투어는 더 진실되어질 테니 말이다.

“날은 아직 어둡고 해변에 다가갈수록 이슬인지 작은 빗줄기인지 군복을 젖힌다. 뚜껑이 없는 철갑 보트에는 대략 30명 정도가 타고 있다. 해변에 이르자 앞 문이 열리면서 저 멀리 독일군의 벙커에서는 속사포가 내리 꽂힌다. 몇 초전까지 옆에 있던 동료는 앞에서 꼬꾸라진다. 그 다음엔 자신의 차례다. 그렇게 ‘Utah’에서의 전투에서 남은 거 오로지 핏자국 뿐이다.”

지금의 ‘Utah Beach’에 핏자국은 없다. 오로지 평화스러움만 남아있다. 가장 잔인했던 전투였기에 지금의 평온은 더 없이 크다. 멋스러운 두 마리의 말이 관광객을 이끌고 있으며 그날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박물관에서는 잊지 말고 살아가라고 가르쳐 준다.

▲‘Utah Beach’ 뮤지엄

다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을 떠올려보면...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은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 ‘American Cemetery of Normandy’에 온다. 백색의 십자가가 놓여 있는 잔디위에서 그는 오열하며 1944년 6월 6일 새벽을 떠올린다.
오마하 해변에 있는 ‘American Cemetery of Normandy’다.

▲미군 희생자 누군가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진이 가슴 아프다.

▲ ‘American Cemetery of Normandy’

오후 4시가 되자 걸려 있던 성조기 하향식이 시작된다. 관람객들 역시 숙연해진다.
내 나라 국기는 아니지만 이 나라가 내 나라라면 목숨한 번 바쳐볼 수 있을 것 같은 철없는 생각이 든다. 6월 6일 새벽, 그들의 죽음을 호기 어린 감정으로 끄집어 낼 정도로 가벼운 죽음은 아닌데 이곳에 오면 그런 생각이 든다. 노르망디다.